하얗게 걷는: The White Walk
이손 작가의 개인전 《하얗게 걷는》은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출발한다. 이번 작업은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거리 곳곳에 현수막을 붙여 온 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회수되는 현수막들 속에는 누군가의 간절함과 소멸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작가는 과거 부모와의 단절 경험으로 인해, 거리에서 마주한 ‘실종자를 찾아주세요’라는 문구가 본인이 원치 않았던 상황에서 부모로부터 받았던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들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경험은 현수막이라는 공공의 이미지를 향한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는 타인에게는 절절한 애정으로 읽히는 그 문구들이 자신에게 어떤 파동을 일으키는지를 인식하며, 한 인물의 마음을 다른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려는 사유의 길로 나아간다. 이 감정의 전환은 지난 개인전 《Drift Bottle》(2024, KT&G 상상마당)에서 구현된 바 있다. 당시 작가는 실종된 딸을 찾던 아버지의 동네를 찾아가, 두 시간에 걸친 장노출을 통해 상실과 기다림의 시간을 포착했다. 혼자 있으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고자 했던 그 내면의 파장이, 이번 전시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신작 <먼 산책> 시리즈가 있다. 서울 해방촌에 거주하던 시절, 작가가 2년간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남산 소월길을 따라 걷는 낮 산책과, 제주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밤 산책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소월길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친 현수막을 보며, 한때 작업을 위해 찾아다녔던 이미지가 일상 속으로 찾아든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약 2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그 길을 찾은 작가는 어느 순간, 제주에서처럼 이 길을 함께 걸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제주에서의 밤 산책은 가족과 강아지, 이웃집 반려견들과 함께 이어져 온 조용한 일상이었다. 작가는 어느 날부터 손전등을 가족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카메라를 들고 그 산책에 동참했다. ‘걷기’는 단절되었던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일상을 함께하는 감각의 통로가 되었고, 이는 카메라를 장착한 강아지 형태의 조형물 <카메라 도기>로 확장된다. 목줄이 연결된 이 장치는 강아지의 시선으로 앞서 걷는 작가의 뒷모습과 주변 풍경을 기록하며, 기억과 몸짓, 장소 사이에 새로운 감각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전시장에는 지난 개인전의 세 작품—<안개>, <달>, <잠긴 문>—이 신작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안개>는 실종자가 살던 동네를, <잠긴 문>은 가족 간 단절의 기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작가의 부모가 처음 만난 장소를 담고 있다. <달>은 두 시간의 노출로 달의 궤적을 담은 이미지로, 작가의 내면이 천천히 변화해 가는 사고의 흐름을 시각화한 작업이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듯 남겨진 달빛의 선들은 작가가 응시했던 시간의 결이며, 감정이 변화하는 과정을 천천히 드러낸다.
신작 <먼 산책>은 스냅사진 형식으로, 일부 이미지의 색상이 반전되면서 색이 하얗게 날아간 듯한 질감을 띤다. 어둠이 아닌, 오히려 밤이 하얗게 드러나는 그 장면들은 단절과 상실의 감정이 애도와 화해로 이행되는 전환의 상징이다. 그것은 감정이 굳게 닫히던 순간을 넘어 다시 연결되기를 바라는 조용한 빛의 언어이기도 하다.
전시 제목 《하얗게 걷는》은 한강의 소설 『흰』에서 가져왔다. 소설에서 ‘흰’은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를 향한 애도이자, 말해지지 못한 존재들을 위한 조용한 헌사로 등장한다. 작가에게 이 ‘하얗게 걷는’ 시간이란, 실종자의 흔적을 따라가며 남긴 궤적이자, 단절되었던 관계를 다시 구성하려는 현재의 몸의 움직임이다. 이때의 ‘흰’은 눈부시거나 결백한 색이 아니라, 누군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침묵의 색이다.
이손 작가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겠다는 목표보다는, 사진을 찍는 그 시간이 나에게 어떤 시간인가에 주목한다”고 말한다. 사진 작업은 그에게 있어 어떤 장소에 반복적으로 머물며, 그 시간을 조금씩 쌓아가는 과정이다. 지난 개인전이 ‘혼자 있으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고자 했던 시간’이었다면, 《하얗게 걷는》은 ‘아직 가까이 있어 보려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몸의 시간이다.
《하얗게 걷는》은 침묵의 색을 따라 걷는 여정이며, 존재를 기억하고 관계를 다시 사유하는 내밀한 기록이다.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들을 향한 작가의 조용한 몸짓이자, 멀어진 이들과 다시 걷기 위한 작고 깊은 발걸음이다. (글. 인가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