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거리: Safe Distance
쉽게 도달하거나 다룰 수 없는 한 수
콘노 유키
2016년에 열린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은 인간과 기술의 대결로 수용되었다. 경우의 수를 예측하여 알파고가 상대방을 공략할 때, 우리가 ‘신의 한 수’라고 부르던 것이 지능화된 기술로 발전된 지점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여전히 손은 중요하지만, 바둑판의 물리적 공간을 벗어난 손은 결정권을 가진 주체의 선택이 기술에 양도받은 ‘한 수’로 대체된다. 귄터 안더스(Gunther Anders)가 말하듯이 행위를 노동으로, 노동을 기동 동작으로 가장하면서 우리의 손은 간접적인 차원에서 휘두르는 결정권으로 전이했다. 우리는 손으로 직접 범행을 저지르지 않아도, 버튼 하나만 눌러 상대방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버튼을 누르기만 해도 많은 사람을 위협에 빠뜨릴 수 있는 무기가 넘치는 시대에, 인간이 치르는 죗값은 ‘기술’에 의해서 소외된다. 안더스가 분석한 시대가 핵무기가 태동한 시점이었다면, 2026년에는 AI로 얻은 답변이 비-행위를 정당화한다—“AI에게 물어보니까 그러더라고요”… 입력과 송출은 우리의 손과 머리와 연동되어, 손수를 쓰는 대신 손수를 아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행위를 범하거나 저지른다는 감각에서 발을 빼려고 한다.
연작 <The Line>(2026)은 뉴스 기사에 소개된 미사일 발사 장면을 평면 작업으로 풀어낸 작업이다. 충격은 자극적이고 종종 선정적인 표현을 통해서 전해진다. 폭발, 총격, 공격에서 출발하여 붕괴, 파괴, 와해, 파편화에 이르는 이미지들은 언어보다 빠르다. 이미지는 사람들을 충격에 묶어 둔다. 언어보다 빠른 언어, 시각이라는 언어는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충격에 차 있으며 시각적인 호소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 시각 언어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침입해 온다. 그런데 이미지가 보여주는 충격은 자극과 무감각이라는 중립된 성격을 지닌다. 우리에게 이미지는 더는 충격적이지 않게 된다. 이미지 한 장에 담기는 것은 프레임 바깥의 입체적인 감각을 담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때 감각이 둔해지는 것은 비-행위가 되는 순간처럼, 우리가 평소에 사진을 접하는 방식과도 결부되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내용을 두고 게임 같거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를 접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우리에게 도착하는 이미지는 게임보다 간접적이고 영화보다 몰입감이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픽션이든 실제로든 ‘연출된’ 것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이웅철은 오히려 이 몰입감이 없는 이미지를 더 몰입감 없게 보여주는, 말하자면 껍데기의 껍데기를 강조하듯이 <The Line>을 선보인다. 추상화된 선과 배경은 실제 이미지보다 선명하지 않다. 그러면서 마치 게임 같다고 하는, 허구로 끌어내리려는 시선을 거부한다.
연작 <Newspeak>(2026)가 소통형 애플리케이션의 대화창을 연상케 할 때, 그것은 하나의 명령(어)이 동원하는 결과를 괴리 안에 풀어놓는다. ‘Pacification’(군사 개입에 의한 통제), ‘Take Out’(상대의 제거), ‘Asset’(전략적 가치가 있는 인적 또는 물적 자원)은 쉽게 입력/송출되면서, 무기질적인 표현에 인간적 행위가 제거된 측면을 보여준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년』(1949)의 무대가 된 전체주의 국가의 새로운 언어인 ‘Newspeak’를 교차하여 해석하자면, 이웅철의 작품은 오늘날 소통하는 언어가 변질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의미의 축소화와 과장 사이에 벌어진 괴리를 보여준다. ‘전리품’, ‘핵○○’, 팩트 ‘폭격’이라는 단어만 생각해 봐도, 우리가 평소에 경험하는 충격은 단어 사용에 따라 이미 축소되고, 그와 대조적으로 과장된 표현—‘지옥 같은’, ‘악마적인’—또한 일상에 넘쳐난다. 말이 지시하는 것과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경험하는 현실은 그 거리감을 사실상 가지고 있다. 직접적인 경험과 간접적인 경험 사이가 점점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으며 그러기에 축소와 과장이 동시에 벌어진다.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하거나 다루는 언어—시각 언어도 포함하여—는 폭력성의 필터를 이미 여러 번 거친 끝에 익숙해진 것이다.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가 이야기하듯이, 인간은 도달할 수 있는 것만 컨트롤할 줄 안다. 우리에게 도달한 이미지와 언어는 그 자체로 우리가 어떻게든 다룰 수 있다—허구로 치부하기도, 그냥 넘어가기도 한다. 이번 개인전에 소개되는 작업이 어떤 상황의 시각적 재현보다 소거의 방식을 취할 때, 이웅철은 쉽게 도달하고 다룰 수 없는 현실을 불통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