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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공장에서 피어 오른 수증기는 잠시 구름의 형태를 유지하다 곧 사라진다. 그것을 과연 ‘구름’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밋밋한 풍경 속에서 그 찰나의 모습은 잠시 현실을 잊기에 충분히 독특했다.” - 이길수


이길수는 작가노트에서 일상의 풍경 속에서 피어난 찰나의 형상에 집중한다. 한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세와 공장지대, 해질 무렵의 공기, 일터를 나서는 외국인 노동자의 뒷모습, 그리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개 한 마리.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장면들은 그에게 있어 삶의 진실을 품은 풍경이다.

작가는 과거 노동자로 머물렀던 가구 공장에서 마주한 장면들을 기록해왔다. 매일의 반복 속에서도 수증기의 형상은 매번 달랐다. 굴뚝에서 피어올라 찰나의 구름이 되려다 흩어지는 그 순간—그 찰나는 마치 인간의 삶과도 같다. 작가는 그 구름이 되려던 수증기의 한순간에 자신의 시간을 겹쳐본다.


“특정한 형상은, 바로 그 시간의 지표이자 증표다. 우주 만물은 생성과 소멸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나는 찰나에 불과한 존재이며, 잠시 눈앞에 스친, 구름이 되고 싶었던 수증기의 순간에 내 시간을 이입해보려 한다.” -이길수


이길수의 풍경은 흔히 저녁이 시작되기 직전, 혹은 해가 지고 난 어스름한 순간의 푸르스름한 빛을 품고 있다. 그의 화면은 짙은 녹색과 푸른색으로 가득하며, 분명한 빛도, 어둠도 구별되지 않는 중간적인 시각의 층위를 드러낸다. 작품은 일반적인 전시장 조명 아래에서는 낯설 만큼 어둡지만, 해가 뉘엇뉘엇 질 무렵—빛이 줄고 조명이 집중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 미묘한 색감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를 두고 “빛의 소중함을 알게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밝고 어두움의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빛의 양’이라는 절묘한 타이밍을 감각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이길수는 유화를 사용하며, Viridian, Prussian Blue, Violet을 중심 색으로, Cerulean Blue로 명도를 조절해 화면을 구성한다. 이 색들은 그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숲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다. 이길수에게 숲은 가까이 있지만 늘 다가갈 수 없는, 일종의 ‘거리 두기된 풍경’이다. 건설현장이나 개발 중인 도심 외곽에서 바라보는 그 숲은 “개별적 존재의 시간을 표현하기에 적절히 고립된 감각을 제공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회화는 도시와 떨어진 외곽, 한적한 노동 현장 또는 공사 중인 주변 풍경들과 연결된다. 외부와 완전히 고립되진 않지만, 늘 한 발짝 물러난 장소에서 사색하듯 시선을 던지는 작가의 시선은, 사라지는 수증기처럼 존재의 찰나를 붙잡는다. 바로 이 중간적이고 모호한 공간, 빛과 어둠이 겹치는 그 지점에서, 이길수는 인간의 존재와 시간, 삶의 이유를 응시한다.


“현실 속에 있지만 작업은 비현실적 상태에서 시작된다. 자기 속에 갇혀야 하고 현실에서 고립되어야 한다.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 비현실적 상황이 매우 강력한 현실이었기에 더 이상 비현실에 자신을 갇히게 할 수 없었다. 그 현실적인 풍경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길수


이전 작업이 ‘위치함’—즉 공간 속 존재의 의미—에 천착했다면, 이번 연작은 ‘시간의 증표’로서의 형상, 즉 찰나를 향한다. 정지된 수증기의 장면은 기억의 프레임 안에 머물며, 서로 다른 시간의 이미지들과 겹쳐진다. 현실과 비현실, 내면과 외면, 존재와 사라짐이 교차하는 그 틈에서 작가는 풍경을 기록한다.


《수증기의 겹: Echoes of Vapor》은 그렇게 태어난 시공의 단면들이다. 무심한 듯 흘러가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장면들. 이길수는 그 사라질 찰나를 묵묵히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바라봄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현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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